본문 바로가기
위험한 망상

그러니까 발렌타인 데이의 유래 ver 1.1?

by staff6 2011. 2. 10.
7년 전에 끄적였던 글인데, 조금 손질해서 재활용해봅니다.

1.

동료들이 보인다. 나와 같이 아득바득 해변을 기어다니던 동료들이 보인다. 나와 같이 사선을 넘나들던 동료들이 보인다. 틀림없이 내가 인식표를 떼어준 동료들이 보인다. 

"소령님! 소령님! 괜찮으십니까?"

누군가가 세차게 몸을 흔들어, 간신히 악몽에서 깨어날 수 있었다. 44년부터 나와 같이 근무하고 있는 중사였다.

"고맙네. 술 한 잔만 주겠나?"

나는 중사가 건네준 위스키를 마시며 창 밖을 보았다. 창 밖으로 늦은 눈이 내리고 있었다.
그렇다. 이 곳은 눈이 내리는 곳이다. 지옥과도 같은 정글에서는 눈이 내리지 않는다. 바닥에 남은 마지막 한 모금을 비우려는 찰나 바깥 철조망에 다닥 다닥 붙어있는 아이들이 눈에 들어왔다.

"더러운 일본놈들..."


2.

나는 더러운 정글에서 간악한 일본군에 의해 수많은 동료들을 잃었다. 그 숫자만큼 나는 일본군을 죽였고, 그에 대해 군은 나에게 훈장과 소령 계급장을 달아주고는 일본 근무를 명령하는 아이러니를 보여주었다.
전쟁터에서는 악귀처럼 싸우던 일본놈들은 패전과 동시에 비굴할 정도로 상냥해졌다. 그렇다고 해서 내 마음 속의 상처는 치유되지 않는다.

"중사. 윌리엄 홀시 제독을 아나?"

"그 분을 모르는 해병이 있을까요?"

"그렇지. 그 분께서는 우리가 지옥에 가서도 지켜야 할 명언을 하나 남겼지."

"명언이라면?"

"Kill jap, kill jap, kill more jap. 전쟁이 끝났다고? 아직이야. 내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 중사! 사냥을 준비해라!"

"Yes... Sir."


3.

나는 중사가 준비해온 톰슨을 집어 들었다.

"톰슨? 난 카빈이 익숙한데."

"오늘이니까요. 오늘은 이 총입니다."

뭐가 되었든 간에 총은 방아쇠를 당겼을 때 총탄이 나가 더러운 일본놈의 몸에서 더러운 피만 뽑아내면 된다. 상관없다.
중사가 운전하는 지프의 옆자리에 올라타 주둔지를 나서자마자, 추운 겨울밤임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옷도 못 걸친 더러운 일본 꼬마들이 하나 둘 보이기 시작했다. 꼬마들은 나와 중사가 탄 지프를 보자마자 손을 내밀며 듣기도 싫은 일본말을 지껄여대며 다가오기 시작했다.
순간 팽팽하게 긴장되어 있던 내 이성의 끈은 '툭'하고 끊어졌고 나는 미친듯이 방아쇠를 당겼다.


4.

'달그락.'

빈 드로프스 통안에서 여동생의 뼛조각이 소리를 냈다. 추위보다도 배고픔의 고통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부르릉.'

조악한 목탄차 소리가 아니라 가소린을 태우며 달리는 미군의 차 소리가 들렸다. 여기 저기에 쓰러져 애써 잠을 청하던 아이들이 반사적으로 하나 둘 일어나기 시작했다.

"기브 미 쪼코레토~"

"김 미 쪼코레토♡"

"기브 미 쪼코레토!"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영어를 마구 외치며 미군에게 손을 내밀며 다가갔다. 무서운 표정의 미군 장교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눈부신 불꽃과 함께 가슴에 통증이 느껴졌다. 설마... 이건?


5.

44년부터 나와 같이 근무하고 있는 소령은 전쟁 영웅이다. 지옥과도 같은 아니 지옥보다 더한 과달카날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으며, 이어지는 전투에서도 큰 공을 세웠다고 한다. 하지만 얻은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다. 그는 정복의 가슴 부분이 축 처질 정도로 많은 훈장을 받았지만, 서서히 미쳐가고 있었다. 아니... 미쳐있다.

소령에게서 사냥 준비를 명령받은 나는 톰슨 기관단총과 지프 그리고 특제 탄환을 준비했다. 소령은 기관단총을 거머쥐고 일본 아이들에게 미친듯이 쏘아댔다. 나는 엑셀을 힘껏 밟아 현장에서 빠져나오면서 따로 준비해두었던 모포와 레이션 캔을 떨궈주었다.

내가 만든 특제 탄환은 45ACP의 탄두를 빼고 장약도 절반 넘게 들어낸다음 폐기 처분 직전의 D레이션의 초콜릿을 탄두 대신 쑤셔박은 괴악한 것이다. 

"하하하! 다 죽어버려! 더러운 일본놈들! 데이 중사. 탄약은 충분한가?"

"발렌타인 소령님. 충분합니다."

느린 발사속도와 잦은 송탄불량에도 능숙하게 대처하며 '사냥'을 하고 있는 소령의 질문에 맞장구를 치며, 나는 특제 탄환이 가득 장전된 탄창을 또 건네주며 기도했다. 
2월 14일. 오늘은 세인트 발렌티누스 데이다. 발렌티누스 성자시여. 당신의 발렌타인 소령과 일본의 어린이들을 돌봐주시옵소서.
반응형